일상에서 벗어났을 때.... /2006 Europa

<Story 1 - Germany> 6. 오래된 성과 함께 숨을 쉬는 사람들

카이르 2013. 5. 16. 20:10

밥을 먹고 서둘러 비스마르크 광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어떤 분이 타신다. 하얀 머리, 빵모자를 쓰시고, 커다란 가방을 메신. 한국 분인 것 같다. 그 분이 내 곁에 앉으시자, 나는 웃으며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했다. 그러자 그 분은 자신에게 인사하는 거냐고 손짓한다. 그러자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반가웠지만 그분은 놀래셨는지, 어떻게 알아봤냐고 물으신다. 그 분은 연세대학교 통계학과 교수님. 숙소에서 멀지 않는 암연구 센터에서 연구를 하러 오셨다는. 나중에 한국에서 보거나, 아니면 하이델베르크에서 다시 한번 보기를 원하고 그분은 만하임으로 나는 비스마르크 광장으로 향하였다.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와 어울리는 만남이었다고 생각한다.



조금 마음이 급했다. 하이델베르크 성과 철학자의 길을 갔다 온 후, 프라이부르크를 방문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어제 밤에 지나갔던 길을 빠르게 걸어, 하이델베르크 성으로 올라가는 골목에 도착했다. 눈이 쌓여있다. 입구를 찾아 헤매다 넘어지고 말았다. 한번 넘어지면 계속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나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올라간 걸까? 시간으로는 십 오분 정도, 계단은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성까지 올라가자 눈 앞에 하이델베르크 시의 모습이 보인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왠 아기자기 해 보이는 마을에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 시간이 멈추었다.



시간이 멈추는 그 곳을 벗어나 약제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약국하고 인연이 많긴 하지만, 성 약국은 현대의 약국과 다르다. 찻잎들이 보관되어 있고, 약을 만드는 기구가 보이고. 오히려 한약방과 비슷한 것 같다. 당시 사람들은 약을 어떻게 지었을까? 그 때야 처방전이라는 개념이 없었을 테고. 증상을 얘기하면 근사한 차로 끓여 나왔을까?


한약냄새가 날 것 같은 약제 박물관을 나와 와인저장창고로 향하였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을 만한 드럼통이 누워있다. 저기다 와인을 담근다면, 얼마나 먹을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일년은 족히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침이 꼴깍 넘어간다. 보라 빛이 나는 붉은 와인을 생각하니까... 갑자기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하이델베르크 성으로 나와 철학자의 길로 향하였다. 첫 번째 여행에서도 시간상 철학자의 길을 가는 것을 포기해야 했는데, 이번에도 쉽지 않다. 가는 길에 넘어지고 말았다. 힘들게 성을 내려와, 카를 테오도어 다리를 건넜다. 소박해 보이지만 거대한 이 다리는 정말 언제 봐도 멋있다. 이제 철학자의 길로 올라간다.

10년도 넘게 산이 있는 학교를 다니는데도, 이놈의 헥헥거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중간에 쉬었는데, 한국말이 들린다. .. 커플이다. 이럴 때는 조용히 아래 풍경을 내려다 보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반대 편에 안개에 둘러싸인 하이델베르크 성이 보인다. 멋지게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안개는 쉽게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다시 일어나, 또 헥헥거리며 십 분은 더 올라간 것 같다. 드디어 철학자의 길이다. 조용한 길. 나는 한동안 멈춰 그 길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나는 칸트가 되어 이 길을 걸어갈 작정이다. 임마누엘 칸트처럼 나름대로 철학적인 생각을 하며 길을 따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나타난다. 운동을 하는 아가씨, 아저씨들.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그리고 추워도 유모차를 끌며 산책을 즐기는 가족들. 처음 볼 것 같은 동양인에게 "하이"라고 인사하는 아가. 그리고 "구텐 탁"이라고 다정하게 인사하는 꼬마.


여기에는 하이델베르크 사람들이 숨쉬고 있었다.

임마누엘 칸트가 되어서 걸어보려는 생각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난 그들과 함께 숨을 쉬었고, 그들이 숨쉬는 소리를 가까이서 들었다. 그것 만으로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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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행기는 네이버 카페 <유랑>에 2006년에 연재되었습니다. 유랑에서 '카이르'라는 닉네임으로 검색하면 전 편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재미있게 읽어주세요.